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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지혜

[스크랩] 퇴계, 그 은둔의 유학<1><2><3>

by 삶의향기21 2017. 6. 25.

 

 

 

학문의 길을 가며, 왜 권력을 곁눈질하는가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선비들의 오랜 딜레마, 修身이냐 立身이냐

 

 

 

 

1. 유학은 언필칭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외친다.

 

학문을 닦아 정치를 한다는 뜻에서 선비들을 사대부(士大夫)라 부른다. 그러나 선비들이 다 정치에 나섰던 것은 아니고, 또 그것을 권장했던 것도 아니다.

조선 선비들의 콤플렉스가 여기 있다. 가족이나 마을의 기대는 이른바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있었다.

어사화를 꽂고 삼 일을 가두행진에 잔치를 벌인 후 술판에 토해 내는 신입식을 거친 다음, 그는 권력과 출세의 가도를 달리는 것, 그것이 모든 가문의 공통된 소망이었다. 그 도도한 흐름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러나 그들이 책에서 배운 것은 “진정 인간이 되라는 것”이었다. 책은 인격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라고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기술로 관직을 사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갈등은 오래되었다. 공자 자신이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젊은이들이 새 통치자의 유능한 기술자가 되기 위해 내 문하로 모여들고 있다.”


그 현실이 공자로 하여금 학문을 둘로 구분하게 했다. 하나는 ‘성숙을 위한 공부(爲己之學)’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인정을 겨냥한 공부(爲人之學)’이다. 유학은 이 학문의 분열 위에 세워져 있다.

 


2. 이른바 인성교육과 입시학원 사이의 갈등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귀족제를 떠나 관료제를 선택하는 순간 이 곤혹은 피할 수 없다. 조선의 교육기관들은 관학, 즉 입시를 위한 학원으로 출발했다. 서원이 생긴 것은 이 황폐를 딛고 진정한 인간을 기르자는 도학(道學) 캐치프레이즈의 결과였다.

그러나 성공할 수 있었을까. 퇴계가 백운동서원에 사액을 받고, 그 자신 도산에 서당을 열었지만, 찾아오는 학도들의 관심은 과거시험 준비에 있었다.

 

“어째 다들 과문(科文)을 익히려고 찾아오는 애들뿐이냐.”

『퇴계집』 한 구석에는 이런 탄식이 적혀 있다.

 

“학부형들은 내가 『심경』이나 『근사록』같은 수양서들을 강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외람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퇴계의 서당이 붐빈 것은 그의 고결한 인품이나 높은 관직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당대 최고의 국가고시 학습교사, 혹은 멘토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3. 책이 가르치는 대로 살겠다는 선비들은 당연히 이 ‘꼭두각시’ 놀음에 끼지 않으려 했다.

퇴계는 오랫동안 관직을 방황(?)하다가 만년에야 비로소 도산에 정착,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65세에 읊은 ‘도산십이곡’에는 이런 노래가 실려 있다.

“당시(當時)에 다니던 길 몇 해를 버려두고/

어디 가 헤매다가 이제야 돌아온고/

이제야 돌아왔으니 다른 곳 마음 말리라.”


퇴계와 동갑으로 영남의 좌우를 갈랐던 남명 조식은 퇴계의 늦은 귀향을 축하하지 않았다.

 

“만은(晩隱)이라니, ‘늦게사 돌아왔다’고? 타락한 정치 속에서 누릴 것 다 누리다가, 이제 슬그머니 기어 들어와 현자의 흉내를 낸단 말이냐.”


남명은 평생을 과거시험과 담을 쌓고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지리산 아래, 하늘 아래 가장 웅장한 곳에서, 천하가 격동시켜도 함부로 나서지 않겠다던 사람이라, 비평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4. 퇴계는 부끄러웠다. 그는 자신의 정치 참여를 ‘어리석은’ 방황이었다고 고백했다.

23세의 젊은 수재 율곡에게 그는 자신의 전철을 밟지 말고 ‘진정한 학문’에 몰두하라고 권했다.

 

“옛적부터 ‘이 학문’을 두고 사람들은 놀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익과 권력을 노리고 경전을 파고들면 길은 더욱 멀어진다!”

퇴계의 이 같은 토로는 저간의 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기억해야 할 것은 도학, 혹은 한마디로 학문(學問)이라 불리는, ‘자신을 위한 공부(爲己之學)’는 조선 유학의 전통에서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퇴계는 나중에 율곡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안타깝게도 재주 있는 자들이 이 학문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도도한 물결은 과거시험과 출세를 향해 가고 있다. 가끔 이 ‘세속의 트렌드’(流俗)를 벗어난 사람도 있지만, ‘이 학문’을 감당할 재주가 아니거나, 또 혹은 자각이 너무 늦어 이미 백발이다. 그대는 젊은 나이에 뛰어난 재주로 우뚝 ‘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후일의 성취를 헤아릴 수 없겠다. 바라건대 오직 천만 번 원대(遠大)하기를 기약할 일이지, 작은 성취(小得)에 자족하지 마시라.”

율곡은 그러나 적극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다. 19세에 금강산을 내려온 이후 내리 장원을 먹어 “아홉 번 장원하신 분(九度壯元公)”으로 불린다. 그는 ‘과거시험이 자신을 팔아먹는 행위’라고 하면서도 그 길을 갔다.

친구들에게 그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구구히 자신을 변명해야 했다.



5. 율곡은 근본적 콤플렉스에 시달리면서도 통합을 모색한다.

그는 두 가지를 제안했는데 하나는 관료 선발에 있어 과거제(科擧制)보다 일찍이 조광조가 실험했던 천거제(薦擧制) 도입을 제안했다.

물론 파벌과 공정성 등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지만, 율곡은 선발자의 식견과 비전을 담보하면 실패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역시 유학의 커리큘럼에 철저해야 한다!

둘째는 지식의 분열을 넘어서고자 한 것이다. 그는 ‘교과서’가 단순한 암기와 답안 작성 이상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격몽요결』 마지막에 그는 이런 해법을 적어 두었다.

“옛적에는 농사를 짓고 등짐을 지며 부모를 봉양하면서도 행유여력(行有餘力)으로 학문을 하여 덕을 쌓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일 않고 과거 공부 하나 하라는 데도 엄살이다.

과거가 이학(理學)과 다르다 해도 독서(讀書)·작문(作文)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 둘은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과거 공부 하라면 ‘나는 도학에 뜻이 있다’면서 잘난 척하고, 이학을 독려하면 ‘과거 공부가 걸려 못 하겠다’고 뒤로 빼니,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하고 늙어 후회를 한다.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닌가.”

 

 

 

 

“깊은 산속 홀로 향기를 피우는, 한 떨기 난초이고 싶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퇴계, 그 은둔의 유학<1>

 

 

 

 

 

1. 퇴계의 철학은 이원론 위에 서 있다. 이원론이란 봉합되지 않은 틈서리, 그 상처에 뿌리는 소금이다.

누가 ‘하나’나 ‘둘’을 그저 개수를 세는 숫자로 읽는가.


대학 초년의 어리석은 경험 하나가 기억난다. 옛 현인들이 ‘하나’를 알면 우주의 비밀을 알 수 있다기에 식당에서 숟가락을 들고 오랫동안 들여다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하나’란, 화담 서경덕이 갈파했듯 ‘수(數)의 체(體)’를 가리킨다는 것을 몰랐다. 하나란 이를테면 분열을 치유한 통합, 삶과 자신의 종국적 화해를 가리킨다. 퇴계는 그러나 이 ‘일원론’의 행복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그가 선배인 화담 서경덕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비판하고, 양명학의 만물일체(萬物一體)를 한사코 배척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2. 그는 말한다.

 

“인간의 내면은 분열되어 있다.”


신체적 욕구[人心]와 정신적 지향[道心]이 갈라져 있고, 사적인 충동[七情]과 공감적 소통[四端]이 부딪친다. 육신의 쇳소리는 날카롭고, 정신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퇴계는 붉은 먼지 가득한 세속을 떠나 정신의 고요를 지킬 수 있는 공간을 그리워했다. 46세, 시골에 돌아와 처음 지은 집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깥을 접고 오직 내적 진실을 추구하겠다는 그의 열망이 선연히 담겨 있다. 그는 마침내 오랜 열망인 수도사적 삶에 안착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기뻐했다.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했던가. 그가 15세 때 쓴 ‘가재’라는 시가 남아 전한다.

“돌을 지고, 모래를 파더니, 어느새 집이 생겼네. 가다가 달리고 정말 발이 많구나. 내 삶은 여기 산골짝, 한 줌 샘물 속인 것을… 강호에 드넓은 물이야 물어보지 않으련다(負石穿沙自有家, 前行却走足偏多, 生涯一山泉裏, 不問江湖水幾何).”

그는 잘못 강호로 나섰다가 늦게나마 수레를 돌려 본래의 고향인 산골짝 샘물 속으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 망녕되이 세상 길에 나아가 풍진(風塵)을 헤매다, 돌아오지 못하고 거의 죽을 뻔했다.”

 

그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고, 정치도 비즈니스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깊은 산속,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향기를 피우는 한 떨기 난초이고 싶다”고 했다.

 


3. 그러나 사람들이 떠나는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갓 등극한 선조는 ‘패퇴한 문교(文敎)를 일으켜 달라고 당부했고, 율곡을 위시한 신진 사류들은 “새로운 정치를 위해 선생께서 조정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애원했다. 퇴계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네.”

“실무야 아래에서 할 일이고, 자리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퇴계는 고개를 흔들며 도산으로 퇴거해 버렸다. 다들 안타까워했지만 한편에서 비웃는 소리도 들렸다.

“무슨 산새도 아니고, 그렇게 숲 속에서 살겠다고 고집이냐.”


질투와 의심 또한 컸다.

 

“물러남을 구해 나아감을 얻고, 작은 벼슬을 사양하여 큰 벼슬을 받는구나(求退得進, 辭小受大).”

 


4. 퇴계는 곤혹스러워했다. 자신은 ‘유교’의 이름으로 물러나고자 하는데, 율곡 등은 바로 그 유교의 이름으로 돌아오라고 붙잡았다. 그는 자신의 은둔이 노장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선택과는 다르다는 것을 극구 변명해야 했다.

도산서당의 입구를 눈여겨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거기 사립짝에 ‘유정문(幽貞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여기 ‘유(幽)’는 운둔을, ‘정(貞)’은 유학의 자세를 가리킨다. 그는 자신을 ‘은둔의 유학자’, 혹은 ‘유교적 은둔자’로 정위했다. 그의 시 전편이 이 두 코드의 병행으로 엮여 있다.

“나는 여름 비 걷힌 달밤에, 말없이 고요히, 마음속으로 주자의 존성명(尊性銘)을 새기고 있다.” 그는 나아가 “내가 산 속에서 사는 것은 유학의 길을 마치기 위해서(隨志非他達所由)”라고 역설한다.

유정이란 말은 『주역』 이(履)괘 효사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을 서구어로 번역한 리하르트 빌헬름은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외로운 성자가 처한 상황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삶의 떠들썩함으로부터 물러나 어떤 것도 찾지 않고,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평탄한 길 위에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며 침해받지 않고 삶을 헤쳐 나간다. 운명에 자족하고 거스르지 않기 때문에 그는 속박과 곤경에서 자유롭다.”

 


5. 조선 유학의 스펙트럼은 넓고, 사유와 개성의 차이는 근본적이다. “티베트에는 승려 수만큼의 불교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퇴계는 이 가운데 수도사의 유형에 속한다. 그는 자주 스스로를 “초야(草野)의 우생(愚生)”이라고 적었다. 여기 어리석음에는 세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다.

1)그는 자신의 낙향이 부나방처럼 권세와 이익을 향해 달려드는 세상을 향한 작은 경종이기를 바랐다.

2)그는 자신이 정치적 리더십이나 행정 능력 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에게 늘 “재주도 없이 허명만 났다”면서 “모기에게 산을 지라면 감당이 되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율곡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아가 백성을 윤택하게 해 주지는 못했으나 물러나 후인을 계몽했다(進不澤民, 退啓後人)”
퇴계가 생각한 진짜 어리석음은 따로 있다.

그것은 3)왜 이렇게 늦게 ‘진정한 학문’을 향해 수레를 돌렸을꼬이다.

청년 율곡에게 그가 던진 충고를 기억한다.

 

“다들 너무 늦게 이 학문에 눈뜨는 바람에 성취가 어렵다. 너는 총명한 재주로 일찍 길을 나섰으니 그만한 다행이 없다.”

 

이제쯤 궁금해진다. 대체 퇴계가 조야의 중망을 저버리고, 그 산골짝에서 그토록 성취하고자 한 ‘학문’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연은 본래 한 얼굴인데, 어찌 감정의 폭풍에 휘둘리는가”

 

퇴계, 그 은둔의 유학 <2>

 

 

 

기(氣)의 사유, 그리고 도가


주자학이 마주친 최고의 경쟁상대는 불교다.

수·당대에 득세한 불교, 그 고도의 형이상학과 치밀한 심층심리학은 가위 난공불락이었다. 주자학은 정면대결을 피하고 사이드잽을 날리기로 했다.

 

“행태만 놓고 보자. 그들은 세계를 환상이라고 떠들고, 가족과 사회를 떠나는 무책임한 짓을 저지르고 있지 않느냐.”

이에 비해 노장은 적어도 ‘실재하는 기(氣)의 세계’를 말하고 있어 인정을 받았다. 주자는 이 기의 우주론 위에 유교 본래의 윤리학을 이(理)의 이름으로 결합시켰다. 아 참, 하나 더 있다.

심리학과 수양론은 공식적으로 배척한 불교의 핵심을 몰래(?) 끌어다 썼다. 그래서 주자학을 유불도(儒佛道) 삼교 통합의 체제로 부른다.

1. 오늘은 노장이 채택한 기의 사유, 그 골격을 보기로 한다. 기는 우리가 늘 쓰고 있는 일상어이지만, 한편 지하철 ‘개량 한복’들의 질문처럼 모호하고, 공중부양을 한다는 분들의 소문 속에 있는 신비이기도 하다.

기는 우주의 원질이다. 기는 먼지보다 미세한, 자기 속에 활동력을 내재한 에너지의 풀(pool)이다. 원초적 태허(太虛)에서 무거운 것은 땅으로, 가벼운 것은 하늘로 올라가 엉겼다. 땅에 수화목금토의 물질이 형성되는 동안 하늘에는 수화목금토의 별들이 생겼다.

하늘과 땅이 맷돌처럼 이빨이 맞지 않아 수많은 생명들이, 사물들이 곡식가루가 흘러나오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태극기의 원환처럼 양극적 대립물들 사이의 교호와 교대의 작용으로 정리되는데, 이를 수식화한 것이 역(易)의 괘상들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역의 그림은 우주에 있어서 오늘날 존재하는 과학에 관한 최고의 기념물”이라고 찬탄한 바 있다.

2. 기들은 구름무늬의 춤으로 비유되듯,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 변환의 역동적 장 속에 있다. 그래서 주로 흐르는 강에, 때로 급류에 비유되었다.
인간은 기의 흐르는 강물 속에서 잠시 엉켜 한시적 삶을 살다, 다시 어머니인 기의 바닷속으로 회귀한다. 노자가 말했다. “보라, 사물들이 분분히 일어났다가,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비슷한 통찰을 만났다.

“시간은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이 모여 흐르는 거친 강물 같은 것. 어떤 것이든 나타났다 하면 순식간에 흘러가버리고, 다른 것이 나타나 그 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그것 역시 금방 사라지고 만다.”

이 흐름 속에는 뜻도 의미도 없다. 그저 흘러갈 뿐. 노장은 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그저 수용하라고 말한다. 니체가 우주의 영겁회귀 그 장엄함 앞에서 ‘신성한 긍정(heilige ja-sagen)’을 읊었던 것과 진배없다.


3. 세상에는 수많은 차이들이 존재한다. 서로 다른 사물들, 가로 놓이고 세로 놓인 것들, 아름답고 추한 것들, 정상적인 것과 이상한 것들…. 자연의 도(道)는 그러나 이 차이들을 무심히 밟고 지나간다.

차이와 구별은 인간의 것이지, 다만 유용성의 편견이고 우상이지 자연의 의도는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장자(莊子)는 말한다.

 

“우리가 ‘분리’라고 부르는 것들이 자연의 관점에서는 ‘생성’이고, 우리가 ‘탄생’이라 말하는 것들이 자연에서는 곧 ‘소멸’이다.”

그렇지 않은가. 존재하는 것들은 우주의 관점에서 다 귀한 자식들이고, 아니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노자가 그래서 왈,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다. 자연은 자신의 급류로 피조물들을 가차없이 쓸어간다. 거기 불평도 원망도 하지 말라.


4. 인간이 벌이는 시비와 선악은 자연의 필연성과 혼돈(混沌) 앞에서 길을 잃는다. 장자의 우화를 기억할 것이다. “혼돈이 있었다. 친구들이 그 흐리멍덩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눈·코·입의 감각기관을 하나씩 뚫어주었더니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혼돈은 위대한 수용이자, 판단 중지를 말한다. 그것으로 관조를, 안심입명을, 아타락시아를 얻을 수 있다.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칭찬과 비난에 초연한 삶, 정념의 파토스를 탈각한 그 자리가 노장이 기의 사유를 통해 확보하고자 하는 지혜 혹은 안목이다.

장자의 비유에 조삼모사(朝三暮四)가 있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에 분노하고,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에 환호하는 어리석은 원숭이들. 그들은 다름아닌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우리네 인간들이다. 장자는 “자연이 본래 한 얼굴임을 모른 채, 헛되이 지력을 소모하는 우리들…, 종류와 개수에 변함이 없는데도 엇갈린 희로의 폭풍에 휘둘리는”

 

우리들을 향해 지독한 독설을 날린 것이다.


5. 기에는 선악이 없다.

마찬가지로 최종적 범주인 삶과 죽음 또한 도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박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친구 혜시가 문상을 갔다가 기겁을 하자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나도 아내의 죽음에 어찌 슬프고 아득하지 않았겠나. 그러나 돌이켜 보니 생명은 원래 없었던 게 아닌가. 혼돈의 흐릿함 속에서 어쩌다 기가 생겼고, 그게 형체가 되고, 다시 생명이 된 것이 아닌가. 그게 또 변해서 이제 죽음이 되었네. 이것은 봄·여름·가을·겨울이 번갈아 오는 것과 같은 것.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거실에 편안히 누워있다네. 그걸 울고불고 곡을 해서 시끄럽게 해야겠나.”

장자가 죽으려 할 때 둘러섰던 제자들은 오랜 주(周)문화의 전통에 따라 후히 장사를 지내고 싶어했다. 장자는 손을 내저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으로 삼고, 해와 달과 별을 주렴으로, 만물의 호송 속에 떠나갈 것이다. 장례준비가 다 되었는데 뭘 더 보태겠단 말이냐.”

짐승과 새들이 뜯어먹을 것이라고 걱정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땅 위에 두면 까마귀 밥이 될 것이고, 땅밑에 두면 개미 밥이 될 것인데, 굳이 이쪽 밥그릇을 저리로 넘길 일이 무어냐.”

 

 

주자, 氣의 세계에 理의 눈금을 새겨 넣다 

 

퇴계, 그 은둔의 유학 <3> 

 

 

 

 

 

 

이(理)란 대체 무엇인가


1 모든 개념에는 역사가 있다. 그래서 풍토와 맥락이 중요하다. 주자학은 이기(理氣)라는 단 두 글자 위에 자신의 체계를 구축해 놓았다. 대체 이 사유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기(理氣)는 얼핏 과학적 인식을 표명하는 듯하다. 그래서 통념은 기를 사물, 이를 원리의 언저리에서 읽어 왔다. 그런데 웬 일, 이 이(理)가 동시에 ‘도덕적’ 당위를 설파하고, 사회적 질서까지 포괄하는 것을 보고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범주를 뒤죽박죽 뒤섞은 이 한심한 사유를 그만 버릴까. 그렇지만 이 혼륜(渾淪)의 사고에 혹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루스 이리가라이의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계속 같은 언어를 쓴다면 우리는 같은 이야기,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기(理氣)를 따라가다 보면 거꾸로 우리의 무의식적 사고습관, 그 자동반응을 성찰하게 될지 모른다.

2 노장은 오직 기(氣)를 말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무의미’에 철저하고자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것이며, 그 ‘혼돈’에 함부로 감각의 일곱 구멍을 뚫지 말지어다. 그들은 그리스 회의주의자들처럼 시비와 선악의 판단을 멈추는 곳에 지혜가 자랄 것이라고 가르쳤다. 기의 영겁회귀에 의하면 인간사는 다만 거대한 시간의 강 속에서 다만 부침하며 흘러가는 하찮은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 삶과 죽음조차 ‘하나’인 동전의 양면일 뿐,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이 전부일까. 주자학은 구체적 시간성과 ‘일상’의 삶이 빠졌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주자학은 혼돈뿐이었던 기(氣)에 이를테면 ‘눈금’을 새겨넣고자 한다. 그것이 이(理)이다.

눈금이 없으면 자로 길이를 잴 수 없고, 저울로 무게를 달 수 없다. 주자학은 이(理)와 더불어 실재하는 차이와 구분을 말하기 시작한다.

노장의 무(無)는 차이를 꺼리고 불교의 공(空)은 구분을 두려워한다.

불교는 분별(vikalpa)이야말로 삶의 고통을 몰고 오는 원흉이라고까지 극언한다. 그리하여 사물 속에는 본래 아무런 구분도 차이도 없음을, 즉 평등(平等)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 전적인 부정은 교각살우 아닐까.

주자학은 사물들의 차이를 인식에 속하기보다 사물 ‘그 자체에’ 속한다고 강조한다. 율곡은 어느 고승에게 “서리 내리면 온 산이 여위고, 바람 따뜻하면 뭇 꽃이 핀다”고 읊었다. 사물들의 세계는 이질적 계기들이 부딪치고 화해하는, 그러면서 질서를 잃지 않는 역동적 무대다.


3 이(理)의 코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맥락에 따라 이(理)의 의미는 다양하고 변주는 무상하다. 잠깐 방심하면 길을 놓친다. 이를테면 이는 우선 기의 ‘원리’와 ‘구조’를 뜻한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때로 이는 기의 ‘재질’과 ‘기능’을, 때로는 그 ‘원인’과 ‘이유’를 뜻하기도 한다. 심지어 기의 ‘연관’과 ‘가치’를 말할 때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뿐인가. 때로 이는 기의 ‘존재’ 자체를 가리킬 때도 있다면 말 다했다. 이 한 글자의 의미는 이렇게 전방위적이고 범주 사이는 자유롭게 건너뛴다.

그 소이(所以)의 메뚜기를 따라가다가 지칠 때쯤,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왜 그러면 안 될까. 주자학은 “이(理)를 통해 기(氣)의 ‘내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어한다.” 그 코드들이 풍부하고 다양할수록 그들의 협력이 세계의 모습을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도와주지 않는가.


4 사물은 ‘대나무바구니의 가닥들처럼’ 일정한 코드와 원리들로 짜여 있다. 삶을 경영하려면 이 질서와 구조를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주자학을 ‘주지주의’라 부른다. 라이벌 육상산은 이 노선에 반대해 자신의 내적 본성에 대한 직접적 자각을 강조한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주자학은 소크라테스처럼 ‘지식’이 우리를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사물과 환경에 무지하다면, 더구나 우리 자신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해서 캄캄하다면 어디를 향해 무슨 걸음을 떼놓을 수 있겠는가.

주자는 이 주지주의적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대학(大學)』을, 그 신성한 경전을 뜯어고치기까지 했다. 그의 모험은 한마디로 “성의정심(誠意正心) 이전에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길을 나서기 이전에 나침반이 필요하다. 자신의 의지를 도야하고 편견과 충동을 제어하자면 그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어느 현자는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전에 먼저 너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물으라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경구는 지금도 유효하다. “너 자신을 알라.” 주자학은 사르트르처럼 인간이 행동을 통해 자신을 창조할 뿐이라는 생각에 기겁을 한다.

로크가 인간에게 본유관념이 없다고 선언하자, 라이프니츠는 철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자연은 자신의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 이(理)처럼 미리 프로그램된 모나드로 구성돼 있다.” 그는 진리를 대리석 속에 갇힌 헤라클레스에 비유했다. 조각가는 그가 숨을 쉴 수 있도록 덮개를 쪼아내고 주변에 붙은 방해물들을 떨쳐낸다.

주자학 또한 인간의 도덕적 개발이 자신의 내적 본성을 자각하고 그 결에 따라 몸을 맡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자연이 당위를 현시한다면, 즉 “우리가 누구인가”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드러난다면 자연과 당위는 연속돼 있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이(理) 안에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이 자연의 이름으로 함께 있게 되었다.

주자는 말한다.

 

“길은 인간(의 인위적 선택)으로 하여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道非因人方有).” 

 

 

 

 

중앙SUNDAY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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